

2021 안준섭 개인전 "고트호브에서"
(주) 미하라는 개인전 주최 및 주관을 하는 등 작가들의 꾸준한 작품활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안준섭 작가는 2021년 갤러리 반디트라소에서 '고트호브에서' 개인전을 통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주) 미하라는 2021년 안준섭 개인전 주최 및 주관을 하는 등 작가들의 꾸준한 작품활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장소: 반디트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239-9)
날짜: 2021년 8월 4일 - 14일
주최: 예술하라, 미하라
후원: 반디트라소 (Bandi trazos)
‘안준섭의 ‘고트호브’ 앞에 서다.
그는 감정의 레이어드라 했다. 나는 색면과 색점, 붓 움직임의 중첩을 본다.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 그들은 이것을 감정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읽는다는 것은 보는 것과 다른 행위일까?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흩뿌려진 꽃들과 같은 그의 그림을 보는 행위가 그림의 의미를 읽어내는 행위와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일까?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했던 그림들의 의미를 모르더라도, 그와 공유한 구체적 기억이 없을 지라도 우리의 봄이 그의 그림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을까? 지금, 여기에, 우리가 살아내고 있다라는 사실과, 육체의 눈으로 보는 존재라는 점이 그와 우리를 연결시켜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고트호브에서」 보여 지는 수평선은 그림들의 시작점과 같다. 선명한 선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림의 전체를 지배하는 어떤 흐름으로 기능한다. 그것이 있음으로써 다른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존재이다. 지난 2019 전시 「구르는 돌」에서처럼 이번 그림들에서도 수평선은 풍경의 일부로서 땅과 하늘을 가르기도 하지만, 여러 번 반복하여 가로지르는 선들로 변주되면서 중력의 방향과 직각을 이루고 있음이 강조된다. 이로 인해, 화면 위에 분주히 움직이는 눈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드의 힘이 부각되고, 좀 더 작게 구획된 색면은 운동성을 가진다.
그에게 물었다. 이 수평선은 어떤 의미인 것이냐고. 그는 그리움이라고 답을 했다. 세상이 주는 고통의 무게가 그를 짓누를 때, 어머니의 부재가 진한 그리움이 되어 그를 힘들게 할 때, 그는 넓은 벌판으로 가서, 두 세계가 갈라지는 그 먼 곳의 선을 바라보며 걷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지면에 발을 딛고 사는 작은 인간을 압도하는 강렬한 하늘의 변화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주변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채워지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여전히 신산한 삶이 계속될지라도, ‘견뎌내고 끝내 이겨 내고자 하는’ 갈망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이끌림에 의해 그 곳,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는 그 자리에서 그는 걸어 다니고 잠시 멈춰 서며 또다시 삶을 살아낸다.
평면과 사각의 프레임이라는 제약을 받아들인 화가로서의 삶은 온 몸으로 느낀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의 원인이 되었던 세상의 모습들을 동시에 보여주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리는 자와 보는 자는 어쩔 수 없이 타자일 뿐이라는 사실은, 아프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의 시작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요즘,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알고 지나가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도 시간의 겹이 만들어내는 찰라 같은 공감의 순간이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전설이 된 이 상황에 화가는 더욱 난처해진다. 그림의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세상 자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 고통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때, 화가는 아파하는 자신의 감정을 소통할 수 있기보다는 자신의 기술을 과시하게 될 뿐이며, 관람자를 공감하는 이가 아니라 구경하는 이로 만들게 된다. 화가 안준섭은 삶의 고단한 모습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도 이를 묘사하지 않아 형상이 사라지게 하는 대신에, 감정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 그림 속에 불행의 원인이 되는 감각뿐만이 아니라 행복이 공존함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그가 수평선을 그리움이라고 말하고 삶이 고통이라고 느낄 때 자신의 봄이 감정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하나의 감정은 정서적 반응의 도화선이 된다. 촉발된 또 다른 감정이 겹쳐진다. 고통의 감정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을 그곳에 함몰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생명의 작용은 자신을 더 좋은 상태로 상향 조절하여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을 느낀다. 고통의 감정 위에 상반되는 생명의 충동이 겹쳐진다. 느낌의 중첩은 자신의 고통을 조금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는 이 중첩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구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가 감정의 레이어드라고 할 때, 나는 색면과 색점, 그리고 붓 움직임의 중첩을 보았다.
색으로 표현하는 어두움과 밝음, 흐림과 선명함, 붓의 움직임으로 나타낼 수 있는 속도와 에너지는 그림의 요소가 된다. 섞임과 구별, 도드라짐과 사그라짐, 뭉쳐짐과 흩어짐,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들은 서로 충돌하고 어울려 흐름이 되고, 리듬감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평면을 다층적 공간으로 바꾸어낸다.
나는 이제 그의 벌판에 서서 세상을 본다. 인간들이 모여들어 무리를 짓고, 서로 다름을 무기로 구별 짓기를 한다. 누구는 밝게 빛나며 존재하는데 누구는 어두워서 배경 속으로 사라진다. 모든 게 엉망이고 혼란스러운 누군가도 있지만 강력한 힘으로 선명한 자신을 피력하는 이도 있다. 많은 것이 모일 때, 차이는 구별과 배제의 기준이 아니라 공존의 활력이다. 모여든 것은 커다란 흐름이 되고 체계가 된다. 가로 세로로 줄 맞춰지듯 짜여 지는 시스템은 안정의 조건이지만, 이제 막 자라나고 있어서 아직은 미약한 존재에게는 극복의 대상이다.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보편성은 받아들이면서, 자신에게 생생한 개별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가꾸어 나가지 않는다면, 자신은 자신으로서 살아낼 수 없다. 그림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의 그림은 자신을 내려누르는 세상 속에서 살아냄의 의지를 표현한다. 체계 속에 틈을 만들어 내고, 자연스런 행위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다듬지 않는다. 그림에 여러 겹을 쌓아 올리며 화가는 전체에 균형을 맞추어 나가지만, 그의 판단이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었음을 감추지 않는다. 겹쳐지고 뒤집히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이면서 그는 방법을 찾아나간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수직으로 서 있는 네모난 캔버스이다. 수직으로 서 있기에 네모의 평면은 특별한 것이 된다. 직립 인간의 눈이 몸의 상층부에 있다는 것 때문에 상하의 무게와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랫부분을 상대적으로 비우고 윗부분에 밀도를 높이는 것으로 상승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반대로 아랫부분을 작고 조밀한 것들로, 위를 넓은 색면으로 채워도 상승의 이미지는 여전히 유지된다. 느슨하게 연결되는 점들 때문이다. 수직으로 서 있는 평면 위의 색점은 드넓은 공간 위를 떠오르는 환영이 된다. 살아있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는 추상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환영을 억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모든 것을 아래쪽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의 경험은 이 상승의 이미지를 가지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윗부분에 배치된 어둡고 넓은 색면과 밑바닥부터 채워져 있는 작은 색점 덩어리의 대립은 내려누르는 압력을 극복하는 어떤 존재의 강한 생명력을 떠올리게 한다.
팔월 한여름엔 겨우 한줌의 초록을 볼 수 있고, 태양이 뜨지 않는 한 겨울이 되면 살인적인 추위를 견뎌야하는 하얀 설원의 땅인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의 옛 이름인 고트호브는 ‘바람직한 희망’을 뜻한다. 18세기 덴마크에서 가족을 이끌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선교사가 이 이름을 지을 때는 고통스러운 삶을 이겨내는 주문 같은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의지를 이름으로 불러내어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도 의지가 물질화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미술평론 박지민
밝은 빛으로 나를 올려주고 어두운 빛으로 뉘우치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이 이루는 어떤 맑은 세계.
“내가 인식하는 부분과 의식 저 너머까지 드러내려 애씁니다.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라는 난해한 지도를 따라 길을 읽고 해석해 나가는 것. 항상 불안정하고 불규칙하고 미완의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더욱 다양한 색채와 불규칙적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며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곳이 바로 ‘고트호브’라도 따뜻하고 아름답고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 길은 언제나 새로울 것 같습니다.”
어두움과 밝음, 행복과 고통 속에서 작가는 늘 그곳을 통과한다. 작가가 지나는 공간은 현실이기도 하고 현실과 무관한 가상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 속에 있는 여러 숨은 감정들. 켜켜이 다져지거나 불쑥한 감정의 결들과 그 상황들을 발견하고 표현한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지금 이곳을 이 공간을 거치며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가. 내가 욕망하고, 꿈꾸고, 좌절하고, 책망하는 그 사이와 공간에서 문득문득 명징하게 느껴지는 어떤 것들.
밝은 빛으로 나를 올려주고 어두운 빛으로 뉘우치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이 이루는 어떤 맑은 세계. 그것이 바로 ‘나’가 아닐까. / 작가노트 중